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몇 주 전 제가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아프셨을까?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님이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크게 통곡을 하며 우셨을까?”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통곡하며 우셨다는 것이 솔직히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아요.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사흘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다 아셨는데 그렇게 통곡까지 할 정도로 슬퍼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져요.”
아-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어때요? 여러분,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다 아시는 분이시고,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굳이 사람들처럼 그렇게 통곡하고 우실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이 통곡하고 우셨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정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컴퓨터처럼 지식만 가지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처럼 감정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것도 아주 세밀한 감정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처럼 슬퍼하기도 하시고, 기뻐하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시고, 화를 내시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시고, 섭섭해 하기도 하시고, 수많은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차가운 이성과 의지만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감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잃거나, 자식이 고통 받는 걸 보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신 고통이라 해도, 아들의 비명소리와 고통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저 무표정하게 방관자의 심정으로 쳐다만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죄 없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갈 때 통곡 그 이상으로 마음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통곡을 삼키시고, 울음을 참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에게 심판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친히 칼을 들어 독자 이삭을 죽이려고 하듯이, 하나님은 친히 외아들인 예수님을 죽이신 것입니다.
남이 내 자식을 죽이는 것을 봐도 부모의 심정이 심히 고통스러운데, 아버지 자신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직접 죽일 때에 그 심정은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격투기 시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격투기 선수인 자기 아들의 시합에 그 부모가 직접 현장에서 참관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선수에게 자기 아들이 심하게 맞는 모습을 보고 그만 그 부모가 정신을 잃고 기절했습니다. 왜 그럽니까? 바로 아들의 아픔이 그 부모의 아픔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에 금이야 옥이야 아주 귀하게 키운 12살 아들이 그만 사고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며칠 후 그 아들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집의 아버지가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지요? 너무나 마음이 슬프고 괴롭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모두 치러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떠가고 난 후, 아버지는 아들의 무덤을 붙잡고 밤새도록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너무나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습니다.
성경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이 통곡하며 우셨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온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다고 합니다.(눅23:44)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자연이, 하늘이, 땅이, 우주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 나타낸 표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미래를 다 아시지만 지금의 고통과 지금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즉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감정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나 지금 아픈 것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계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냉정한 컴퓨터 지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함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자녀가 아픕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가 수술을 마치고 나면 곧 회복될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자녀가 수술을 받는 동안 아파서 울면 부모도 같이 웁니다. 왜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그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아들의 고통을 보면서 아버지로서 함께 아파하며 우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사흘 후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걸 생각하면 도리어 기쁘지만, 현재는 십자가에서 아들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갑니다. 즉 하나님은 미래만 바라보고 현재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시며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미래고, 오늘 현재 나사로가 죽자 그의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그들과 같이 슬픈 감정을 느끼며 우셨습니다.(요11:35)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을 믿어도 결국 누구나 다 죽게 됩니다. 그때 가족들과 교우 분들이 함께 모여 장례식을 치룹니다.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영혼은 여기 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에 갔고, 죽은 육체도 결국 찬란한 부활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겁니다.
그런 미래를 바라보면 슬퍼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에 느끼는 이별의 슬픔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겪은 가족들의 정이 끊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떠나고, 이 땅에 남겨진 가족들의 허전함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즉 믿음은 미래를 내다보며 기뻐할 수 있지만, 소망은 미래를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지만, 참 사랑은 지금 아픈 것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각자 인생을 살면서 친구나 이웃 혹은 가족들의 병문안을 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 환자 분에게 믿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기도해줍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음대로 될지어다. 주여- 병이 나을 줄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이렇게 소망의 말을 전해줍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으니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 질 거야. 힘을 내. 파이팅!“ 이 말을 듣다 보면 너도 나도 막- 힘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기도와 소망에 하나님이 즉각 응답하시고, 치료해 주셔서, 얼마 후에 병이 낫고, 퇴원하여 건강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믿는다고, 기도했다고, 바라본다고, 다 병이 낫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리어 병이 더 중해질 때도 있고, 아픔과 고통이 더 심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도 안통하고, 소망도 안 통할 때,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망과 낙심에 빠져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이제 그만 둬야 할까요? 여러분, 이때는 하나님의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애야, 너의 병이 낫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현재 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나와 같이 우시고, 나와 같이 고통과 아픔을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이 세 번 나타납니다. 앞서 말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히5:7) 이것도 어찌 보면 예수님이 우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 사흘 후면 찬란하게 부활 하실 텐데 왜 우시는 겁니까? 메시아가 체통머리 없이! 창피하게시리!
아니에요.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현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처럼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똑같이 심적 육적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우리 대신 저주를 받아서 버림을 당하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즉 사흘 후에 부활을 생각하면 기쁨이지만, 오늘의 고난과 당장 겪어야 할 십자가를 생각하면 너무 힘이 들어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신 또 다른 장면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습니다.(눅19:41-42) 예수님의 죽음 이후 40년이 지나 주후 70년이 되면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유대인들 110만 명이 잔인하게 학살을 당하고, 남은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온 세상에 흩어져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라보시고 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보면 결국 1900년이 지나면 이스라엘은 다시 나라를 찾게 되고, 결국 강성한 나라로 회복이 됩니다. 이런 사실들이 이미 성경에 다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한편으론 슬프고 고통스런 역사도 있고, 반면 기쁘고 행복한 역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며 우시는 분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높아지고 잘 나갈 때 나의 옆에 가까이 하며 나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면 나와 함께 슬퍼하며 울어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냉정하게 나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않는 분이시요, 나와 함께 인생을 동고동락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보다 더 큰 위로자가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 예수님의 영, 보혜사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면,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나와 함께 먹고 마시며, 내 안에서 기뻐하고, 통곡하며, 슬퍼하며, 행복해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의 입을 사용하며 말씀을 하시며, 예수님이 나의 눈물을 주관해 슬픔을 나타내시며, 예수님이 나의 감정을 주관해 통곡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내가 우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우는 것이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즉 지식뿐만 아니라, 의지뿐만 아니라, 감정에 있어서도 나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고, 감정이 서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식과 의지가 하나 되는 것보다 더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탄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친히 간구해 주신다는 겁니다. 고로 내가 탄식하는 것이 실은 내 안에서 성령님이 탄식하는 것이요, 내가 기도하는 것 같아도 실은 성령님이 내 입술을 빌어 같이 기도하는 겁니다. 즉 기도생활, 신앙생활, 모든 생활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겁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해서 같이 감정을 공유하며 사는 것처럼 예수님과 내가 같이 사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지금 나와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우시고 때로는 통곡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쪼록 이런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이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함께 지식과 의지뿐만 아니라, 감정도 공유하시며 인생을 보다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감정까지 공유하시는 하나님과 같이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주님과 우리가 마음과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되며, 같이 대화하며 큰 행복 속에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