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앞에서 기뻐하라.

날짜: 
2026/02/14
말씀: 
살전5:16
말씀구절: 

16 항상 기뻐하라

설교: 

저의 집 가라지(차고) 벽에 액자들이 많이 붙어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그중에 이런 성구가 적혀 있는 액자가 있습니다. (이것도 한번 보여주실래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제가 차를 타고 가라지를 나가거나 들어오면 이 구절이 항상 보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보면서 “그래, 기뻐해야지. 그래, 기도해야지. 그래, 감사해야지.” 하고 다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뭐 동물이나 인간이나 배부르고 평안하면 일단 본능적으로 기쁩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문제가 없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돈 걱정 안 하고, 좋은 일 생기면 행복합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기쁨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라고 합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인간사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서 우셨고, 모세도 화가 나서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지기도 했고, 능력의 엘리야 선지자도 지치고 힘들어서 죽여달라고 했고, 다윗도 근심과 스트레스 때문에 울부짖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적어도 슬픔과 우울과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에서 기쁨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아무리 슬프고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쁨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멘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도가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에 대해 알아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쁨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여러분, 성도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구원이란 일단 내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겁니다. 부활이요, 영생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대통령 혹은 큰 권세자와 원수가 되어도 살기가 힘든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얼마나 살기가 힘들까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으로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그분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그분의 따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산다는 것은 성도들의 큰 기쁨의 이유입니다.

3. 성령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성도 안에 거하시며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는 희락(기쁨)”(갈라디아서 5:22)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로마서 14:17)입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억지 감정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면 자연히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4.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2)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로마서 5:3) 여러분,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그냥 고난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다가온 고난은 우리들의 믿음을 연단하고 소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5. 장차 받을 영광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보다 미래의 영광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이 세상에서의 온갖 부귀영화보다 장차 우리가 하늘에서 누리는 그 영화로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고로 성도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좋아하는 성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즉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상 성도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살펴보았는데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성도의 기쁨은 ‘무엇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는가’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께 속한 존재입니다. 고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런 기쁨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요즘 우리 성도님들의 표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민 생활을 하면서 각자 여러 가지 근심된 일이 있을 수 있고, 화가 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색이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종종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안 좋은 표정을 바라보는 상대방은 어떤 느낌일까요? 아마 기분이 좋지 않겠지요. 이런 생각도 들 겁니다. “또 뭔 일이 있는 모양이다. 혹시 나에게 뭐 좋지 않은 감정이 있나?” 그러면서 상대방도 기분이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안 좋은 표정을 옛날의 왕 앞에서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느헤미야 2:1-2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는 왕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근심이 있느냐? 이는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왕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어땠을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느2:2)

왜 느헤미야가 크게 두려워했을까요? 당시 신하는 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왕 앞에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자칫 불만과 반역과 불충으로 오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신하는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즉 왕 앞에서 근심한 얼굴을 하는 것은 큰 결례이자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 에스더서에서도 이와 같은 사상이 있습니다. 에스더 4:2 말씀입니다. “대궐 문 앞에서는 굵은 베옷을 입은 자가 들어가지 못함이라” 즉 슬픔과 애통의 모습은 왕의 궁정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누구보다 자신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신하가 왕 앞에서 근심하면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저 신하가 나에게 불만이 있지 않나?“ 하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왕이 폭군의 경우는 당장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하나님에게 대입해봅시다. 성경은 하나님을 왕 중의 왕으로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즉 나의 표정이 왕이신 하나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근심의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작게 여기는 불신의 태도요, 왕 앞에서의 불신앙적 태도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기적을 베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고, 고기도 실컷 먹게 해주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도 막아주시고,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며 화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한 세대가 모두 쓰러졌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왕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데 도리어 불평하고 화를 내면 나도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성도는 상황이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왕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도가 사람 앞에서 안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은 단순한 표정 문제를 넘어서 신앙과 복음증거의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사람 앞에서의 표정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얼굴과 태도가 마음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계속된 어두운 표정은 불평이 마음에 쌓여 있거나, 감사가 막혀 있거나, 믿음의 시선이 상황과 환경에 묶여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3)입니다. 성도가 불신자에게 그런 무표정과 불평 가득한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사람, 믿어도 달라지는 게 없구나.” “저 신앙은 기쁨이 없구나.” 즉 표정이 어두워지면 복음의 신뢰도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성도가 교회에서 계속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고, 공동체의 기쁨을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칫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슬픔의 종교로 인식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만날 십자가의 고난만 지고, 늘 근심하며 어둡게 살아야 한다고 오해합니다. 저도 은혜를 받기 전, 성령을 받기 전,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모를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기뻐하고 웃으면 뭔가 가볍게 보이고 경건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나이다”(시편 16:11)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시편 100:2)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10)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오늘의 주제를 다루면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하박국 선지자는 상황이 좋아서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시편 51:12)

결론입니다. 외국 땅에서의 살면서 자칫 기쁨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을 잃으면 그 믿음은 쉽게 지치고 맙니다. 신앙의 기쁨을 잃으면 신앙은 무거운 의무와 의식이 되고, 세상 앞에서 복음증거의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기쁨이 있는 성도는 말하지 않아도 그 기쁨을 통해 복음이 드러납니다. 기쁨은 복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로 반드시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아무쪼록 왕 앞에서 항상 기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왕 되신 하나님, 저희들이 왕 앞에서 안 좋은 표정으로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회개합니다. 사람들에게 안 좋은 표정을 지으므로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도 회개합니다. 기쁨의 주여, 저희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