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님들 중에 새 차를 사서 저에게 보여주며 기도해 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도요타 Rav4를 사신 분이 있습니다. 그 차의 모습을 보면 특히 뒷모습이 최근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그 차의 뒤에 보란 듯이 스페어타이어가 떡- 하니 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모델은 스페어타이어가 아예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거 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기 캐나다에 자동차 몰고 다니면서 스페어타이어 써보신 분 있습니까? 저도 28년째 여기 캐나다에서 자동차 몰고 다니지만 스페어타이어 써본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타이어 펑크가 난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일시적으로 공기 주입을 해서 가까운 정비소까지 가져갑니다. 정 안되면 견인차를 불러서 해결합니다. 굳이 스페어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은 스페어타이어가 거의 필요 없는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너는 스페어타이어야.”라는 말을 할까요? 만약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기분이 어떨까요?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이 윌리엄 왕자고, 둘째는 해리 왕자입니다. 큰 아들 윌리엄은 아버지 뒤를 이어 장래에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면 둘째인 해리 왕자는 무엇일까요? 그는 스페어입니다. 2023년 해리 왕자가 자서전을 냈습니다. 그 자서전 제목이 뭐지요? 예- ‘스페어’입니다. 즉 자기는 형 윌리엄의 스페어타이어와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어느 나라든지 왕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미 왕이 될 형이 있으니 둘째인 자기는 그저 스페어타이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즉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아버지 찰스 왕을 비롯해 왕실에서도 자기를 스페어 취급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결국 해리 왕자는 그의 아내와 함께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도저히 스페어 취급을 받기 싫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가 스스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스페어인가?” 어때요? 여러분, 이 질문에 나도 해리 왕자처럼 겉으로만 그럴듯하지 실지는 별로 쓸모없는 스페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저의 경우는 위로 누님 한 분과 여동생 한 분이 있습니다. 아들은 저 혼자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스페어 취급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이라고 좀 더 우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학교 시절 때에도 제 도시락에는 항상 계란 반찬과 고기반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식으로 쨈이나 버터를 바른 샌드위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누님 도시락에는 계란 반찬과 고기반찬이 없었습니다. 그저 김치만 있었습니다. 물론 간식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하지만 당시에는 아들선호 사상이 심하게 있었고, 남존여비 사상도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 형제들이 있고, 그 중간에 낀 자녀의 경우는 자칫 스페어 취급을 받으며 자라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자존심이 상하고, 자존감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지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증가하고, 이는 불안, 우울, 대인관계 문제, 비판에 대한 과도한 반응, 사회적 위축 등이 흔하게 나타납니다. 그 결과 대인 관계를 회피하거나, 강박적인 행동을 반복하거나, 각종 스트레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쉽게 지치고 피로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이 불행해지고 살맛이 없어지고 맙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성경적인 대처방안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나의 가치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쓸모가 있어서, 내가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의로워서 나를 높이 평가하고, 나를 택하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너무 못나고 연약하고 불쌍하기 때문에 나를 택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부모가 되어보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가장 사랑하는 자녀는 누구일까요? 자녀들 중에 가장 잘나고 똑똑한 자녀일까요? 아닙니다. 부모가 가장 사랑하는 자녀는 도리어 자녀들 중에 가장 어수룩하고, 뭔가 부족하여 이 세상에서 혼자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자녀나 장애를 가진 자녀에게 더욱 신경이 가고 그를 돌보게 됩니다.
즉 나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나를 지으시고 만드신 하나님만이 나의 가치를 매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을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괜찮은 줄 압니다. 혹은 남들이 자기를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줄 압니다. 반면 스스로 자기를 낮게 평가하여 늘 낙심하고 기분이 처지는 분이 있습니다. 혹은 남들이 자기를 조금이라도 안 좋게 대하면 그로 인해 심한 우울감과 비탄에 잠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거 둘 다 안 좋습니다. 나에 대한 가치 기준을 타락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에게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가치가 수시로 요동칩니다. 그로 인해 불안정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나의 가치는 반드시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가치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저 또 다른 한 사람인 스페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오직 하나뿐인 존재입니다. 당신은 그 누구와도 대체불가의 오리지널 Only One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하나뿐인 독생자를 희생하셨을 만큼 너무나도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그 이름도 찬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성경엔 예수님을 가리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인 외아들임을 강조합니다. 그 하나 밖에 없는 너무나도 귀한 독생자를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죽이고 대신 나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부모가 되어보신 분들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실 겁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누가 나에게 100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내 자녀하고 바꾸지 않습니다. 내 자녀는 내 생명보다 귀중합니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아니- 하나님, 도대체 미쳤어요? 돌았어요? 정신이 나갔어요?”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정상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만큼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결정은 심히 쇼킹한 사건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이 귀한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성도님들에게 보다 감동적으로 전하고 싶어서 이에 대한 예화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귀한 예화 하나를 발견하여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에 모티브를 얻은 예화입니다. 옛날 유럽의 한 작은 마을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 다리 위에는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있었고, 그 다리 밑으로 큰 배가 지나갈 때면 신호원이 수동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는 구조였습니다. 반면 기차가 올 때는 신호원이 역시 수동으로 철로가 깔린 다리를 내려서 연결해야 했고, 그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야만 수백 명이 탄 기차가 안전히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을엔 한 어린 아들을 둔 신호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외아들과 함께 근무를 나갔습니다. 아들은 신호실 옆에서 놀고 있었고, 아버지는 다리를 들어 올려 배 한 척을 통과시킨 후, 곧 이어 도착할 열차를 위해 다리를 다시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근처서 놀던 아들이 기계 틈에 발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아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남은 시간은 30초. 아들을 구하러 내려간다면... 기차는 철로가 있는 다리가 내려오지 않아 강물에 빠져 수백 명이 죽게 됩니다. 아버지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울부짖으며 레버를 당겨 다리를 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기차는 무사히 지나갔고 승객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간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며 기차 안에서 즐겁고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아들은 기계 틈에 끼어 몸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나 그날 그 기차 다리 밑에는 눈물에 젖은 아버지가 피범벅이 된 아들의 시체를 품에 안고 통곡을 하고 엉엉-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어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 대신 몸을 찢고 비참히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인류가 살아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불신자들조차 너무나도 자주 들었던 뻔한 기독교 이야기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잘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의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그 눈물과 통곡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몇 주 전에 제가 ‘하늘의 아버지, 땅의 아버지’라는 설교를 하면서 그만 마지막에 좀 티가 나게 울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고 식당에서 1남선교회 분들하고 식사를 하는데 그분들이 묻습니다. “목사님, 왜 우셨어요?” 여러분, 제가 왜 울었을까요? 알아맞혀 보십시오.
집에 돌아오자 저의 집사람이 한국의 장인어른과 통화를 하고 난 후 또 묻습니다. “왜 설교 하다가 우셨어요?” 그러면서 저의 장인어른이 저의 그 설교를 동영상으로 보고 난 후 저의 집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김목사가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은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의 집사람이 다시 확인 차 저에게 묻는 겁니다. “그래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었어요?” 이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에이, 뭐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었겠어?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울지 않는데...” 그럼 무슨 이유 때문에 제가 울었을까요? 한번 알아 맞혀 보십시오.
첫째, 아버지로서 외국 땅에서 개고생하며 험악하게 인생을 산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신세 한탄하며 울은 것이다.
둘째, 아버지로서 너무나도 무능력하여 자녀와 가족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하여 슬퍼서 울은 것이다.
셋째, 목사님이 나이가 먹으니까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조그만 일에도 감동이 되고 울은 것이다.
넷째, 목사님이 요즘 심적으로 육적으로 많이 안 좋은 모양이다. 사모님하고 사이가 안 좋은가? 사모님과 따님이 우리 목사님을 왕따 시켜서 서러워서 울은 것일까?
다섯째, 성도님 중에 목사님을 누가 힘들게 하고 목회가 힘들어서 울은 것일 수도 있겠다.
여섯째, 목사님이 혹시 노년에 우울증이 왔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자- 이 중에 몇 번째일까요? 저도 이 질문을 받고 그때 제가 왜 울었는지 궁금해서 다시 녹화된 설교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하- 이거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날에 설교한 내용 중에 탕자 아버지의 모습에 비추어진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울은 겁니다. 특히 탕자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기 막- 위해 달려가는 그 모습이 나의 모습과 조명이 되어 울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아들을 희생하며 죽여야만 했던 그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과 통곡 소리를 생각하니 마음이 찡- 하여 울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제가 25살 때에 성령을 받고 난 후에 눈물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울은 겁니다. 즉 울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이 되어 울은 겁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가끔 통곡을 하며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있습니다. 보통 설교자가 설교 준비하면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준비하면 그 설교는 일단 저에게 은혜가 되고, 성도님들에게도 꽤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됩니다. 한국의 경우 어떤 때는 성도님들이 그러한 설교를 듣는 중에 저처럼 통곡을 하며 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심전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 겁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무정해진다고 합니다.(딤후3:1-5) 즉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감정이 메말라진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이 세대를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외아들을 죽이는 데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심히 통곡을 하며 우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자녀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너무나도 귀하고 사랑스런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때 부모가 느끼는 심정은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괴로울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하면서도 미치도록 사랑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얻기 위해 내 하나뿐인 아들을 희생했단다. 그런데 너는 그 사랑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의심하고, 그 사랑을 가벼이 여기는구나. 사랑하는 아들아(딸아), 너의 구원은 절대 값싼 것이 아니란다. 너를 얻기 위해 나는 내 생명보다 귀하고 온 우주보다 귀한 독생자로 그 값을 치렀단다. 고로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나의 자녀란다.” 아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죽여야만 했던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사랑받는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하시고, 처지지 말게 하시고, 그 사랑을 날마다 느끼며 더욱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