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왕년에 내가 말이야~”,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이 말은 흔히 세상에서 과거를 자랑할 때 쓰는 유행어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왕년 타령’ ‘과거 타령’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꼭 과거의 영광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특히 연세가 드신 꼰데 분들이 그렇습니다.
“목사님, 제가 왕년에 철야기도를 밥 먹듯이 하던 사람입니다.” “나 때는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교회를 세웠어요.” “왕년에 내가 성령 체험하고, 방언도 터지고, 전도도 엄청나게 했지!” 네, 그거 다 귀하고 아름다운 발자취입니다. 그런데 제 그 찬란했던 ‘왕년’은 참 감사한데, 그렇다면 오늘 당신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고난과 고통이 찾아와 눈물 흘릴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거대한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된 바로 그다음 날, 즉 영적 승리감에 도취할 때가 위험합니다. 또한 아무런 문제 없이 평안하여 기도를 쉬고 영적 긴장감이 풀릴 때가 위험합니다.
우리는 어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해 놓고도, 오늘 너무나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순을 자주 겪습니다. 성경은 왜 우리가 ‘어제의 승리자’에서 ‘오늘의 패배자’로 전락하는지, 그리고 반대로 ‘어제의 패배자’가 어떻게 ‘오늘의 승리자’로 역전할 수 있는지, 그 강력한 법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알아봄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패배로 바뀐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기를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을 돌았고, 마지막 날 큰소리로 외치자 성벽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완벽한 ‘어제의 승리’였습니다.
그다음 전투는 여리고성에 비하면 잽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성, 아이성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보고합니다. “거기는 삼천 명만 올라가도 충분히 이깁니다. 다 올라가서 피곤하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땠습니까? 이스라엘은 아이성 사람들 앞에서 비참하게 도망쳤고 3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물처럼 녹아내렸습니다. 비참한 ‘오늘의 패배’였습니다.
왜 패배했습니까? 어제의 성공 경험에 취해 하나님을 ‘패싱’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은 자신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아이성 앞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제 보니까 대충해도 되던데? 내 경험과 실력으론 이 정도쯤이야!”라는 자만심이 들어오는 순간, 거대한 여리고를 무너뜨렸던 영웅들이 도리어 가장 작은 아이성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9장 안에는 정말 기가 막힌 영적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할 완벽한 능력을 주셨고,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나가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어제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용맹한 장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구절 지나지 않은 누가복음 9장 40절을 보십시오.
변화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한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왔는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아니 1절에서 모든 귀신을 제어하던 자들이, 왜 40절에서는 똑같은 귀신 하나를 못 쫓아내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까?
다름 아닌 능력을 내 개인의 ‘소유권’이나 ‘기술’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공적인 전도 여행 이후 은혜의 자리를 떠나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9장 46절을 보면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크냐?”라며 서열 싸움을 벌입니다.
마음속에 교만과 욕심이 가득 차니 성령의 충만함이 순식간에 소멸해 버린 것입니다. 아이성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보니까 요렇게 하니까 귀신이 나가던데?” 하며 기도의 줄이 끊어진 껍데기(과거의 경험)만 가지고 소리를 지르니, 귀신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 기도원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 이를 직접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당시 순복음 기도원에는 전국적으로 귀신들인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상담실 방이 대여섯 개가 있어서 항상 목사님들이 찾아온 분들에게 상담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고, 귀신도 쫓아줍니다.
그런데 같은 주의 종이라도 귀신을 쫓아내는 목사님이 있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주저주저하는 분도 있고, 아예 귀신을 못 쫓아내는 분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7)
아니, 믿는 자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떤 분은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데 귀신을 쫓아내고, 어떤 분은 왜 귀신을 못 쫓아내는 겁니까? 이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일지라도 기도해야 귀신이 나갑니다. 도대체 얼마큼 기도해야 귀신이 나갈까요? 귀신의 종류에 따라서 다릅니다. 약한 귀신 졸병 귀신은 빨리 나가고, 강한 귀신 대장 귀신은 나가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리고 일단 귀신을 쫓아낼 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귀신은 인간의 힘으로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쫓아냅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분이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26:40)고 하신 것처럼 적어도 하루 한 시간은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 부교역자 분들에게도 이건 의무로 합니다. 즉 새벽예배에 나와서 한 시간은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어제 공기 좋은 산에 가서 숨을 아무리 깊고 크게 쉬었어도, 오늘 숨을 쉬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어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었어도, 오늘 굶으면 또다시 배가 고픈 것처럼, 영의 양식인 기도는 어제의 축적분으로 오늘을 버틸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자동 결제 시스템’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것은 영원하고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매일매일 공급받아야 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담아두는 저장 탱크가 아니라, 매일 하늘에서 흘러내려 와야 하는 샘물입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최신 스마트폰도 어제 충전해 놓았다고 충전기를 빼놓으면 금방 방전됩니다. 기도의 충전기를 빼놓은 채 “나 왕년에 성령 받았던 사람이야”라고 외쳐봐야, 오늘 세상 유혹과 마귀의 공격 앞에서는 배터리 수명이 다 되어서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은혜를 쏟아버리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성이라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은혜를 아무리 부어주셔도 줄줄 샙니다. 길거리에서 누가 시비 한 번 걸면 쏟아지고, 집에서 가족들이 마음에 안 드는 말 한마디만 해도 어제 받은 은혜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냅니다.
고로 밑바닥이 새는지 살피고 늘 보수해야 하고, 은혜가 떨어지면 늘 보충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왕년 이력서’를 절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제 기도했던 사람, 어제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 무릎 꿇고 성령 충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어제 비참하게 패배했던 자들이, 오늘 찬란한 승리자로 뒤바뀌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게 어제의 패배를 오늘의 승리로 바꾸는 모습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은 교만했다가 아이성 1차 전투에서 36명이 죽고 물러나는 비참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어제는 실패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패배한 자리에 주저앉아 낙심만 하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옷을 찢고 재를 무릅쓰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아간의 죄를 찾아내어 철저히 회개하고, 공동체를 정결하게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의 실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략을 온전히 따랐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이성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신 하나 못 쫓아내고 수치를 당한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무서워서 모두 도망치고 배반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들은 완전히 끝난 실패자요 패배자였습니다. 어제의 그들은 영적 부도 수표였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다시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약속의 성령님이 임했고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 높아지겠다고 서열 싸움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순수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다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날마다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치는 위대한 천국의 군사, ‘오늘의 승리자’로 대반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어제 죄에 넘어지셨습니까? 어제 신앙생활이나 삶의 자리에서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고 낙심의 자리에 주저앉아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어제의 패배 역시 오늘의 패배를 결정짓지 못합니다!
마귀는 자꾸 우리의 귓가에 “너 어제 무너졌잖아. 고로 넌 안 돼.”라며 과거의 패배에 우리를 묶어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제의 패배를 내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와 회개해라.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 나를 다시 의지해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제의 승리 때문에 교만해질 이유도 없고, 또한 어제의 패배 때문에 절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어제 승리했으니 오늘도 괜찮겠지.”라는 자만심을 깨트리십시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아침 새로운 만나를 거두었던 것처럼, 매일 아침 기도의 충전기를 주님 보좌에 꽂으십시오.
우리가 겸손히 주님의 손을 다시 잡는 바로 오늘, 하나님은 오늘의 하루를 어제의 패배를 뒤집는 찬란한 ‘역전의 날, 대 승리의 날, 영광의 날’로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과거와 왕년의 추억 속에 사는 신앙인이 아니라, 매일 매일 오늘의 승리 속에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과거의 승리에 취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의 그 일로 낙심하지도 않게 하시옵소서.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겸손히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늘 그때마다 새로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