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주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아니면 혹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치고 피곤한 한 주를 보내고 오늘 이 자리에 겨우 엎드리셨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말을 내뱉고 살지만, 그중에서도 현대인들의 입술에 거의 독점하다시피 붙어 있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피곤하다.”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리서치 기관들의 통계를 바탕으로 재미있는 계산을 해본 자료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하루 평균 적게는 5번에서 많게는 7번 이상 “피곤하다. 지친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낸다고 합니다. 이것을 1년으로 치면 약 1,800번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70년, 80년 인생을 계산해 보면, 놀랍게도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무려 10만 번 이상을 “아유 피곤해. 힘들어. 지긋지긋해.”라는 말을 하며 살아간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숨 막히게 하고 진을 빼놓는 피로가 무엇입니까?
일이 많아서 피곤합니까? 몸을 많이 쓰는 육체노동이 힘들어서 피곤합니까? 아닙니다. 진짜 우리를 쓰러지게 만드는 피로는 바로 사람에게서 오는 피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혹은 입 밖으로 나도 모르게 이런 탄식을 내뱉는 것입니다. “아유- 피곤하다, 이 인간아!”
내 옆에 있는 남편을 보며, 아내를 보며, 자식을 보며, 직장 상사나 동료를 보며, 심지어 믿었던 교회 지체를 보면서 “저 인간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 보기를 원합니다.
정작 내 인생을 가장 피곤하게 만들고 실망시키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남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 아닙니까? 매번 결단하지만 또 넘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눈물 흘려놓고는,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또다시 죄와 욕심과 그 못된 짓을 반복하는 내 안의 부패한 ’옛 자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스스로를 향해 절망합니다. “아유- 내 안의 이 인간아, 참 피곤하다 피곤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울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 보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주면 금방 까먹고, 기적을 베풀어 주어도 사흘 만에 또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우리 인간들을 보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쩌겠습니까?
예레미야 17장 9절은 선언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여러분,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서 서로 자기의 의를 주장하며 죄의 독가스를 뿜어내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아유- 이 인간들아, 참 피곤하다. 피곤해!” 하실 만큼 절망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간이 원래부터 이렇게 피곤하게 살도록 창조되지는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피로가 없었습니다. 쉼과 안식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가 들어온 순간부터, 땅은 엉겅퀴를 내고,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사는 ‘피곤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족보를 보면 아주 흥미로운 영적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홍수 이전의 조상들은 나이가 기본이 900세였습니다. 무드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만물보다 부패한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그 타락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죽지도 않고 한 동네에서 900년 동안 부대끼며 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영적인 피로감, 죄가 쌓이고 쌓여서 서로를 향해 뿜어내던 그 숨 막히는 죄악의 무게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6장에서 탄식하십니다. “인간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
여러분, 하나님도 자신이 만든 이 인간들의 부패함에 지치셔서 결국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습니다. 그 홍수 심판 이후에 인간의 수명이 뚝 떨어졌습니다. 모세는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900년을 살던 인간의 수명이 홍수 이후에 점차 줄어들어 결국 70년, 80년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거 왜 그렇습니까? 다름 아닌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저주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인간이 타락한 죄의 성품을 가지고 900년을 산다면 그거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는가?
아- 그렇지 않습니까? 그 못된 녀석과 40~50년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900년을 같이 산다고 생각해봐요. 그거 지옥이 따로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수명을 그렇게 확- 줄이신 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이 부패한 인간들을 향해 베푸신 일종의 ‘자비’일 수도 있습니다.
즉 “너희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그 피곤한 죄성을 가지고 900년 동안 피 터지게 싸우며 죄짓지 말고, 70년 80년만 수고하고 끝내라. 그리고 피곤함이 없는 천국으로 오너라.”라는 하나님의 영적 브레이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없는 인생은 900년을 살든, 80년을 살든 본질적으로 수고와 슬픔이라는 만성 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지독한 죄의 피로감 속에 갇혀 있던 한 여인과, 그 여인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평생 10만 번이 아니라 20만 번은 ‘피곤하다’를 외쳤을 법한 기구하고 지친 인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타는 듯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행복한 삶을 꿈꾸었던 여인입니다.
“이 남자를 만나면 내 불행한 인생이 행복으로 바뀔까? 이 사람이라면 나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남편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또다시 실망과 상처, 그리고 이별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피곤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세상의 우물에서 두레박을 내렸지만, 돌아서면 또다시 목이 마른 무한 반복의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고 살고 있지만, 이 여인은 이제 사랑에 대한 로맨틱한 꿈이나 인생의 반전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는, 완전히 지치고 지친 탈진상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눈빛이 무서웠습니다. “저 사람이 또 내 과거를 수군거리겠지. 나를 정죄하겠지.” 하는 극심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정죄를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하고 끔찍해서, 여인은 차라리 살이 타들어 가는 더위를 택했습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인 정오를 택해 홀로 물동이를 메고 우물가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단지 2000년 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에 사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캐나다 땅에도 이 현대판 수가성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람에게 치이고 상처받고,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당해서 “아유 피곤하다, 이 인간들아! 이제는 한국 사람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고 이 낯선 이민 땅으로 건너오신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심지어 여기 캐나다에 와서도 사람 만나는 게 피곤하고 무서워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없는 외딴 시골구석이나 저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서 자발적 ‘자연인’으로 숨어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 안 보고 저 광활한 로키산맥과 대자연만 보고 살면 이 피로가 풀릴 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진리를 들으십시오. 사람을 피해 캐나다의 아무리 깨끗하고 장엄한 대자연 속에 나를 갖다 놓아도, 내 안에 있는 부패함과 상처, 죄의 쓴 뿌리는 똬리를 튼 채 그대로 따라옵니다. 장소만 바뀔 뿐 피곤함과 갈증은 여전합니다. 혼자 있어도 내 안에서 올라오는 미움과 억울함 때문에 더 깊이 지쳐만 갑니다.
즉 세상의 우물가에서는 결코 내 인생의 피곤함과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기가 막힌 장면이 등장합니다. 6절입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육 씨쯤 되었더라.”
여러분, 본문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도 ‘피곤하셨다’라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터덜터덜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땀을 흘리며 피곤하여 주저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눈에 비친 첫 예수님은 위엄 있는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치고 피곤해 찌든 또 한 명의 인간 남자’일 뿐이었습니다. 여인은 속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유- 저 인간도 참 피곤하게 사네. 이 땡볕에 왜 저러고 있나!” 그런데 그 피곤해 보이는 그 남자가 슬며시 자기에게 다가와 말을 겁니다. “여인아, 내게 물 좀 줘라.”
이 여인, 안 그래도 사람 상대하기 피곤해서 일부러 사람이 없는 이 시간에 우물가에 왔는데, 한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거니까 귀찮고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입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여러분, 내 인생이 너무 피곤하면, 내 곁에 찾아오신 구원자조차, 예수님조차 나를 귀찮게 하는 피곤한 존재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왜 그토록 피곤해하셨습니까? 다름 아닌 힘들고 지친 그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유대 땅에서부터 사마리아 구석까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냥 지친 나그네가 아니라, 이 여인의 평생의 피로와 죄의 저주를 끊어내기 위해 친히 피곤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나의 구원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부패함을 다 알고 계셨지만,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이 여인의 계속되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성령의 생수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피곤에 지친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생수를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을 받으면, 세상에! 신기하게도 인생이 안 피곤합니다. 온종일 주의 일을 하고, 이민 생활의 거친 삶을 살아내도 그렇게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다름 아닌 내 안에서 성령의 생수가 끊임없이 샘솟아 새 힘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을 받고 믿음 생활을 했는데, 왜 또다시 어느 순간부터 “아유- 피곤해, 이 인간아!”라는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옵니까? 왜 또다시 사람이 싫어지고, 교회 오는 것도 지치고, 저 깊은 숲속으로 도망치고 싶어집니까? 그거 몸이 갑자기 늙어서가 아닙니다. 환경이 나빠져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배터리가 방전되니까, 내 안의 부패한 죄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모든 상황과 인간관계가 나를 짓누르는 끔찍한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우물물이 아니라, 날마다 성령의 생수를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생수를 공급받자 그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극도로 싫어했던 이 여인이 도리어 마을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보십시오. 그녀가 이렇게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피곤함에 찌든 여인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인간을 기피했던 여인이 도리어 인간을 찾아갑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70년 80년 나그네 인생을 살며 평생 10만 번이 넘게 “아유- 피곤하다. 이 인간아!”라는 탄식을 뱉으며 살아갈지라도, 우리에게는 성령의 샘물을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고로 이 자리에 인생 살면서 종종 피곤한 여러분들이여-
예수님에게 성령의 샘물을 달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 성령의 샘물을 넉넉히 마시므로 여러분들도 이 땅에서 누구나 겪는 그 피곤함에서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인생의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칠지라도 독수리 날개 치며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새 힘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또다시 희망찬 전진을 계속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만물보다 부패한 죄성을 가지고 세상의 우물가에서 두레박질하느라 영육간에 피곤해 지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피곤에 지친 우물가의 여인에게 새 힘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