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신비주의를 보십시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이나 동굴로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등지고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행하며, 신의 경지나 해탈이라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종교가 아니라, 높이 계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내려오시는 종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참 자주 합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방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나는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해.”라고 마음먹는다면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려면 방문을 열고 나가야 합니다. 대상을 만나야 하고, 그 곁에 머물러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저 높은 하늘 보좌에 홀로 고고하게 앉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말로만 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러 이 땅 낮은 곳까지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숨었을 때도 하나님은 먼저 찾아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고, 결국에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세리, 죄인들이 뒹구는 삶의 한복판에서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즉 그들을 사랑하기에 만나러 오셨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함께하신 분,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인 예수님입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놀라운 신비 체험을 합니다. 주님의 얼굴과 옷이 광채가 나고, 오래전에 죽었던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납니다. 그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삽시다.”(막9:5)
즉 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 세상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우리끼리만 신비한 은혜 속에 행복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자기만 행복하고, 자기만 잘 먹고 잘살자는 좁은 마인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셨습니다.
산 아래 내려가니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귀신 들려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아이와, 그 아이를 보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망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고한 신비주의적 체험에 머물지 않으시고, 고통받는 백성이 있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 그들을 치유하고 돌보셨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세상을 등지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의 백성들과 함께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직분을 받았고, 믿음이 자랐다면 이제는 교회 안에 새로 온 낙심한 자, 상처받은 자, 서성이는 연약한 백성들을 돌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신앙의 연수가 오래될수록 오히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단단한 벽을 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한 곳이 서울 강서구 목동 사거리에 있는 ‘대흥 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생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늘 주일 아침에만 어머님과 같이 대예배에 간신히 참석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군 제대 후에 은혜를 받고 난 후 청년회 모임에 갔는데, 아- 얼마나 어색하고 뻘줌한지! 있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 공간이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곳에 있는 청년들이 대략 10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새로 왔는데 저를 반기는 것 같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를 외면하는 겁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며 뭔가 좋아서 웃는데, 그들의 웃음이 꼭 나를 향해 비웃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날 별로 마음이 안 좋아서 다음 주는 청년 모임에 안 가려고 하는데, 아- 하나님이 청년회에 계속 있어 보라고 합니다.
그렇게 순종하며 몇 주가 되었는데, 그 후에 청년 중에 저처럼 새로 온 청년이 한 분 더 생겼습니다. 그 청년은 신학교를 다니고 주의 종의 길로 가려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저도 새로 와서 청년회가 어색한데 그분도 새로 와서 같이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저에게 친구로 붙여준 겁니다.
그렇게 짝이 생기다 보니 계속 청년회에 있을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저처럼 새로 교회에 찾아온 청년들에게 친절히 다가가 대화도 하고 붙잡다 보니 청년회가 금방 두 배, 세 배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담임 목사님이 청년 모임에 오셔서 교회가 생긴 이래로 청년회가 가장 부흥이 많이 되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때 청년회가 부흥된 이유는 딴것 아닙니다. 내가 직접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는 은혜를 받고, 그 신학생분도 은혜를 받고 새로 온 청년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간 겁니다. 즉 이전에 청년회가 부흥이 안 된 이유는 기존 멤버들이 자기가 편한 사람하고만 어울리고, 새로 온 사람은 외면하며, 성격이 안 맞으면 같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사랑은 일단 만나는 겁니다. 만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같이 밥을 먹지 않는데 어떻게 돌봅니까?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진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홀로 서성이는 사람, 아직 어울리지 못해 겉도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숟가락을 놓아주고, 곁에 앉아서 서비스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기적인 고집이나 편견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큰 상처와 질병, 혹은 극심한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사람 앞에 서는 것조차 숨이 막히고 두려운 연약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본인도 어울리고 싶고, 백성을 돌보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지만, 마음의 불안이 통제되지 않아 골방으로 숨어버리는 안타까운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의 연약함과 눈물도 다 아십니다. 그렇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힘들다면, 여러분의 골방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처럼 힘들어하는 분들을 위해 중보기도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분들을 위해 우선을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여, 그들의 마음과 정신과 육체가 치료되게 하시옵소서. 그들도 같이 어울려 밥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여러분, 성경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 좋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려고 하실까요? 다름 아닌 예수님이 자신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계21:3).
여러분,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서 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으시며, 우리와 더불어 이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장차 주님과 함께 그 수많은 백성을 돌보고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이곳 캐나다 땅에 왜 왔습니까? 정답은 하나님이 보내서 이곳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와 너를 그리고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을까요? 다름 아닌 이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보라고 저와 여러분들을 이곳에 보내신 겁니다. 아멘이시지요?
그러나 이곳의 상황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극심한 대적과 비방 때문에 마음이 크게 위축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엄청난 위로와 사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여러분, 사도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기에, 고린도 사람들의 거센 핍박 앞에 두려웠고, 입을 닫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바울아, 힘들지? 그러니 너는 저 안전한 산속으로 피하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처한 어려운 환경을 단번에 바꿔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바울은 다시 일어설 담력을 얻었고, 주님이 부탁하고 맡기신 백성을 돌보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세가 되면 될수록 세상 사는 것이 참 힘듭니다. 사람들의 성격과 성품도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만물보다 가장 부패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하나님은 이곳에 자신의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내 백성을 돌보자고 하십니다. 그렇게 저와 여러분이 백성을 돌보는 사명을 맡았기에 우리가 이곳에 왔고, 이 사명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맡겨준 그 사람을 돌보며 사십시오. 부모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녀를 돌보십시오. 그 자녀들을 주님의 말씀과 훈계로 가르치며 모범을 보이십시오. 아내와 남편분들이여, 각각 자기의 배우자를 돌보십시오.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과 아내가 가장 돌보기 힘든 녀석인지 모릅니다.
아- 녀석이라고 하면 안 되지요? 정정합니다. 그분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봅시다. “그분!” “그 귀하신 분!” 여러분, 부부가 살면서 제발 그 귀하신 분을 욕하지 마십시오. 정떨어집니다. “아- 목사님! 이미 정떨어졌어요.”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래요. 진짜 정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남남인 그 여자 그 남자가 한 지붕 밑에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결혼하지 않으셨잖아요. (?) 그런데 이미 어리석게도 결혼한 여러분들이여! 어쩌라고요.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아예 처음부터 결혼하지 말았든지…. 이미 결혼했으니 누굴 원망하고 어찌 후회합니까? 제가 목사님으로 그런 분들에게 좀 잔인한 말 같지만 주님의 뜻을 전해 드릴게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애들아, 억울하고 분해도 웬만하면 그냥 살아라.”
아멘인가요? 노멘인가요? 오늘은 노멘이지만 얼마 후에 확실히 아멘으로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인간이 부부가 되어서 같이 사는 것, 그거 기간이 얼마 안 됩니다. 금방 나이 먹고, 금방 백발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그 웬수도 가고요, 그분도 다 갑니다. 그런데 이거는 아십시오. 그 웬수 데리고 사시느라 참 힘들지만, 하늘에 올라가면 하나님이 큰 상을 줍니다. “애야, 원수 같은 내 백성 데리고 사느라 큰 고생 했구나!” 하고 위로해 줍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원수 같은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그 귀한 사명이 있기에 우리도 이 땅에 존재합니다. 지금은 사람 만나고 대하기가 힘들지만, 더 좋아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람 돌보는 은사를 하나님께 구하시고, 사람 돌보는 귀한 은사가 생기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조금 더 인내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아무쪼록 그날에 주님의 큰 위로와 큰 상급이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고린도 성에서 두려워 떨던 바울에게 찾아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오늘 우리도 듣게 하옵소서. 주님의 백성을 사랑의 눈으로 보는 시각을 주시옵소서. 그 백성들에게 다가가 친절을 베풀 수 있도록 발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주님이 맡기신 백성들이 있는 이곳이 사명의 자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