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르다

날짜: 
2026/09/20
말씀: 
고전7:7, 24
말씀구절: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설교: 

한국어 표현 중에 두 단어를 잘못 사용하면 굉장히 거슬리는 대표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다르다(Different)’와 ‘틀리다(Wrong)’라는 단어입니다. 한국어에서 ‘틀리다(Wrong)’라는 단어는 셈이나 사실이 잘못되었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수학 시험에서 2 + 2 = 4인데 5라고 적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반면 ‘다르다(Different)’라는 단어는 정답과 오답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과를 빨갛게 그린 아이와 초록색으로 그린 아이는 누구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관찰한 시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럼 사과를 까맣게 그린 아이는 어떤가요? 혹시 그런 아이를 본 적이 있나요?

이는 아주 특이한 경우지만 그렇게 사과를 까맣게 그린 아이를 보고 즉시 “애야, 사과는 빨간색인데 넌 틀렸어!”라고 단정하며 지우개로 지우게 하는 것은 아이의 생각과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듭니다. 대신 “왜 사과를 까맣게 그렸어? 어떤 사과인지 이야기해 줄래?” 하고 물어봐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혹시 알아요? 그 아이가 나중에 초현실주의 화가인 피카소처럼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까만 사과’ 역시 정답과 오답으로 재단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이고 다름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사과의 일반적인 색을 아는 아이가 지속해서 모든 것을 검은색으로 칠하거나 어두운 그림만 그린다면 이는 아이의 내면 상태를 살피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아동 미술 심리에서 과도한 검은색의 사용은 아이 안의 깊은 불안, 불만, 억압된 감정, 혹은 마음의 상처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대화를 통해 아이의 불만과 상처를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좀 특이한 경우지만 아이가 색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색맹이나 색약 등 생물학적 문제가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다르고, 저 사람은 저렇게 다릅니다. 특히 외국 땅으로 이민을 오시는 분들은 개성이 강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개성이 강하다 보니 서로가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종종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 이민 사회의 현실입니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틀린 존재(Wrong/Abnormal)’로 조작하여 그를 지배하려는 심리적 폭력입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간관계에서는 두 사람의 감정과 시각이 다를 때 “아,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나랑은 다르게 생각했네.” 하고 상대의 독자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상대의 다른 기억과 다른 감정과 다른 판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의 기억이 틀렸어. 너의 기억력이 이상한 거야.”라고 말함으로 상대의 인식을 파괴합니다. 혹은 “네가 예민해서 그래. 그렇게 느끼는 네가 이상한 거야.”라고 말함으로 상대의 감정을 파괴합니다.

혹은 ”다 너 잘되라고 한 말인데, 나를 나쁜 사람 만드는 너가 틀렸어.”라고 말함으로 상대의 도덕성까지 파괴합니다. 즉 상대의 다름을 틀렸다고 지속해서 몰아붙임으로써, 피해자 스스로 ”내가 틀렸고, 저 사람 말이 맞구나.“ 하고 자신의 현실 감각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되면 결국 그는 상대방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성과 남성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남성과 여성으로 각각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즉 같은 사람이지만 남편과 아내는 다른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다름의 간격을 이해하지 못해 갈등과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특히 여성은 대개 감성적이고 남성은 이성적입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다툼을 예를 들어볼까요. 퇴근 후 아내가 직장에서 있었던 억울한 일에 대해 남편에게 하소연합니다. “여보, 오늘 김 부장이 또 말도 안 되는 일로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 있지? 너무 서럽고 속상해서 화장실 가서 많이 울었어.“ 이때 아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이 내 편을 들어주고, 내 서러운 감정에 공감해주며 ”그래. 많이 힘들었겠네, 고생했어“라는 위로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이 말을 듣고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아- 그 김 부장이 원래 그런 스타일이잖아. 그럴 때는 당신이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서류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했어야지. 그리고 화장실 가서 울지 말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대처해 봐.“ 즉 남편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아내의 대처법을 지적하며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어때요? 남편 여러분, 이 남편의 대처법에 틀린 것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아내가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지고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봤어? 당신은 항상 내 편은 안 들어주고 나만 잘못했다 그러지!“ 즉 남편의 그 대답에 아내는 상처를 받는 겁니다.

이때 남편은 ”아니- 내가 당신 도와주려고 해결책을 말해준 건데 왜 나에게 화를 내? 이상한 여자네. 아- 왜 자꾸 피곤한 남편을 갈궈?“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감정을 수용해주기는커녕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나 ‘남편을 괴롭히는 못된 와이프’로 몰아가는 것에 억울함과 분노가 극에 달해 즉각 반박하게 됩니다.

“내가 언제 당신을 갈궜어? 왜 나를 이상한 여자로 만들어? 피곤한 건 당신만 피곤해? 나도 힘들어서 얘기한 건데, 말을 왜 그따위로밖에 못 해? 됐어. 이젠 당신하곤 말 안 해.” 그러곤 확- 자리를 뜨거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아버립니다. 이때 남편 여러분, 기가 막히지요?

그런데 부부생활 오래 하신 분들은 아시고 있지만, 부부간에는 늘 이런 식으로 대화가 됩니다. 저도 결혼생활 이제까지 34년간 했지만, 아직도 이런 부부간의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로 이때는 이렇게 대답하면 어떨까요? “누가 내 와이프에게 뭐라고 해? 아- 김부장 그 새끼 못된 녀석이네. 여보 무조건 당신이 옳은 거야. 우리 와이프, 왓팅!”

여러분, 목사님이고 이성적인 저의 경우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참 공처가 같고, 쪼다 같은 말입니다. 더구나 이성을 강조하는 목사님으로서 바른 대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내의 처지에서 보면 이 대답은 어떤가요? 어때요? 아내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남편을 꼭 껴안아 주고 싶도록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제가 이 대답을 인공지능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인공지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아내가 가장 원했던 ‘내 편이 되어주는 마음’을 정확하게 겨냥한, 그야말로 100점짜리 공감 반응입니다. 앞서 대화에서 아내가 겪었던 억울함과 화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면서, 부부 관계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감정을 달래주기 위해 잠시 아내의 편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부부가 똑같이 타인을 향해 맹목적인 비난과 분노와 욕설에 함께 빠져드는 것은 ‘감정적 공감’을 넘어서 ‘함께 죄를 짓는 모의’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성경이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부부간의 ‘공감’과 ‘동조’가 어떻게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화입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남보다 존경을 받고 높아지려고 하는 남편의 잘못된 생각에 그 아내가 동조했고, 남편 역시 아내의 탐욕을 바로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부는 똑같이 한마음이 되어 거짓을 말하다가 같은 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이겁니다. “부부는 서로의 감정을 들어주고 받아주는 지지자여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기준을 넘어 타인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데까지 한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부부는 함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품이어야 하지만, 타인을 쏘아대기 위해 같이 세운 포병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남편이 나 대신 싸워주고,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둘러주는 것이 아니라,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부부가 함께 거룩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신앙의 바른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7:7)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4)

제가 처음 순복음 기도원에 전도사로 발령이 되고 상담실에서 상담할 때에 아예 고린도전서 7장을 펴놓고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을 기다렸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는 결혼 이혼 재혼 별거에 관한 내용이 세밀하게 나와 있습니다. 즉 현대인들이 많이 상담하기 원하는 내용이고 이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창조 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결혼해서 열심히 애를 낳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하나님의 뜻은 결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7장에는 누구는 결혼해야 하고, 누구는 결혼하지 않고 그냥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저의 경우 25살에 성령을 받고 주의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에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까 늘 삼각산이나, 한강 변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저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30살에 기도원 전도사가 되어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내려가면 또다시 삼각산에 가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밤중에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큰소리로 기도를 하는데 옆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어- 기도원 전도사님이 또 여기 오셨네.” 그렇게 총각 때에 주의 일을 매우 열심히 하니까 이미 결혼하신 목사님이나 연세가 많이 드신 여자 전도사님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김 전도사님은 결혼하면 힘들겠다.” “왜요?”

“아- 결혼해서 만날 그렇게 기도하러 산에만 가면 아내가 뭐가 좋겠어?” 그때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아내와 같이 기도하러 산에 가면 되지. 뭔가 문제야.” 그런데 제가 장가가기 위해 저의 집사람과 만나서 데이트를 하기 위해 어디를 갔을까요? 삼각산일까요? 기도원일까요? 어린이 대공원입니다. 당시에는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인해 어른들도 어린이 놀이공원에서 데이트하는 것이 추세였습니다.

거기서 뭐했을까요? 조용한 곳을 찾아 돗자리를 펴놓고 ‘주여-’ 하고 기도를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놀라서 당황해하더라고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 기회가 되면 전도하니까, 저의 집사람이 쑥스러워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일상이고 당연한 일인데, 그 당시 저의 집사람은 같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초등부 교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어린이 대공원에서까지 데이트하러 와서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던 겁니다.

암튼 저는 저의 집사람과 33살에 결혼했습니다. 그때 저의 집사람은 30살이었고요.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는 결혼하신 분들도 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도 있고, 지금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장차 결혼을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예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책임을 배워가는 부르심(은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사는 자유로움 속에서, 혹은 생명의 대물림을 멈추고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사명에 온전히 집중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느 한쪽만 정답(옳음)이고 다른 쪽은 오답(틀림)이 아니라, 각자 하나님께 받은 그릇과 분량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복음을 전하느라 너무나 많은 여행을 해야 했고, 위험한 상황을 겪었기에 결혼을 포기했고, 하나님이 또한 그에게 독신의 은사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거나, 혹은 결혼을 했어도 자녀를 갖지 않는 분들 중에 자신의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이를 포기하는 분들이 요즘 제법 많이 있습니다. 즉 배우자에게 자신의 그 유전적 질병이 큰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유전적 질병이 대물림되어서 그 아이가 힘든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안타깝지만 책임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혹은 책임 있는 부모로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에 대해 “나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있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좋은 길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맞춤형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남들의 눈치나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은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남들이 나이 먹고 다 쉴지라도 나는 계속 일해야 한다면 일을 해야 합니다. 남이 가는 길이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이 있고, 내게 주신 기질이 있고, 내게 주신 은사가 있고, 나에게 주신 일터와 가정이라는 나만의 필드가 있습니다. 고로 남들과 비교하여 주눅이 들거나 우쭐하지 말고, 주님이 내게 주신 은사의 분량대로 기쁘고 감사하며 인생을 완주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우리를 각자의 모양대로 오묘하고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잣대로 서로를 판단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했던 우리의 좁은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나에게 허락하신 은사의 분량을 깨달아, 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이 주신 맞춤형 사명의 길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완주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