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불쌍히 여김’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여성의 ‘자궁(womb)’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바라볼 때 생기는 본능적인 연민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실패했을 때, 힘들어 혼자 울고 있을 때, 나를 바라보시며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첫 감정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을 꼭- 껴안았습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우리의 죄를 꾸짖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죄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면 됩니다.
혹시 실수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실수한 당신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당신을 불쌍히 보십니다. 괜찮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힘들어할 때, 하나님은 가장 빨리 달려오시는 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많이 보이시는 감정은 ‘불쌍히 여김’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모습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9:36)
저들이 3일 동안 먹지 못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15:32) 저들이 병들고 귀신이 들려 고통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14:14) 예수님은 우리들의 가련한 영적 상황, 육체적 연약함, 생활의 문제 등 모든 영역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단지 종교와 윤리와 철학만 가르치는 선생이 아닙니다. 배고픈 자는 먹이시고, 병든 자는 치료하시고, 우는 자는 위로하시며, 나를 지옥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를 불쌍히 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로 우리도 남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계속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여행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그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죽을 정도로 심히 때렸습니다. 그가 길에서 신음합니다. 죽어갑니다.
그때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그를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의 일을 하는 레위인도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천하다고 멸시를 받은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먹이고 쉬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모에게 돈을 쥐여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더 들어가면 자신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돈을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아- 이 사마리아인은 왜 이렇게 친절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까요? 강도 만난 자가 자기 친척도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고,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나중에 그로부터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함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즉 너도 고난 당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도와주라는 겁니다.
우리가 남을 전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그냥 놔두면 지옥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영원히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아- 안됩니다. 그를 그대로 놔둘 수 없습니다. 그를 지옥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그도 예수님을 믿고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즉 전도의 가장 큰 동기는 ‘불쌍히 여김(compassion)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단 예수님 못 믿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제일 불쌍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억만장자 부자라도, 큰 권력을 가지고 명예를 가졌어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가 불쌍하게 보입니다. 겉은 아무리 잘나고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짧은 인생을 살면서, 꿈틀대고 허우적대고 지옥으로 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예수님 믿고 같이 천국에 가자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원수조차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눅23:34) 스데반 집사님도 군중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들을 향해 기도합니다. “주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돌을 던지는 사람보다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 집사님이 더 불쌍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보다, 십자가에서 조롱을 당하며 고통스럽게 죽는 예수님이 더 불쌍한데,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님은 도리어 자신을 조롱하고 죽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는 그 무지함으로 인해 저들이 그런 죄를 지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비난의 돌을 던지고, 심히 안 좋은 말과 행동을 하여 나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와 더불어 같이 욕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왜 그럽니까? 그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렇게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가 상황판단을 잘못했거나, 혹은 뒤에서 마귀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고로 그의 죄는 밉지만,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원수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물론 원수를 불쌍히 여기며,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웬만한 성인군자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그분의 마음이 나를 주장하시면, 나도 그분의 힘으로 원수까지 불쌍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멘이지요? 아직도 아멘 하기에는 좀 힘듭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 선지자에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원수의 나라 앗수르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두 망하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와 정 반대 지역으로 배를 타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러다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죽을 고생을 하며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무서워 니느웨에 가서 외쳤습니다.
“너희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왕을 비롯해 모든 백성이 금식을 하고 겸손히 땅에 엎드려 회개를 하는 겁니다. “아- 이게 아닌데! 저 녀석들이 회개하면 안 되는데…. 회개하면 자비의 하나님이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줄 텐데.”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를 내심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 니느웨 도시를 바라보며 니느웨가 당장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어라- 한참을 기다려도 니느웨 성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뜨거운 태양 빛 때문에 자기만 더워서 미치겠습니다.
요나는 잔뜩 화가 났습니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 하나님께 따지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오. 죽여- 죽여-” 그러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합니다. “에이그- 녀석! 승질도 참 드럽네. 요나야- 이 큰 성읍 니느웨에 20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다 죽었으면 좋겠냐? 이 성에는 육축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도 다 죽었으면 좋겠냐고? 에이- 속 좁은 녀석. 너는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구나.”
여러분, 요나 선지자에겐 공의와 정의가 있었습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요나 선지자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 녀석은 나쁜 녀석입니다. 아주 못됐습니다. 콱-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정의가 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벼락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사람, 여전히 나보다 잘 먹고 잘삽니다. 방귀도 뿡뿡- 잘 뀝니다. 여전히 잘난 체도 합니다. 어이쿠- 그 모습을 보니 내 속만 더 뒤집힙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 도대체 살았어요. 죽었어요? 이거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착한 사람만 불쌍히 여기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못된 녀석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나에게 혹은 많은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그 사람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요나 선지자처럼 너무 열 받지 마십시오.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도 하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게 자신의 건강에 좋습니다.
물론 그에게 너무 큰 상처를 받고, 억울함과 분노가 순간순간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분노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키지는 마십시오. 혹은 혼자 끙끙대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조차 불쌍히 보는 영적 시각으로 자신을 다스리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해보십시오.
아- 물론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내가 살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도 되지만, 먼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를 용서하지 않고 계속 미워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면 마음이 풀립니다.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7살에 배다른 형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하여 애급으로 끌려갔습니다. 13년간 외국에서 처절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강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3년간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애급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복수할 아주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도다.”(창50:20) 여러분, 요셉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형들을 향해 심한 욕과 함께 복수의 칼을 휘둘렀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줌으로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원수를 불쌍히 여길 때, 내 마음도 자유로워집니다. 원수를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미워할 이유보다 불쌍히 여길 이유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로 사람 때문에 무너진 마음이 있다면, 상처 준 사람이 떠올라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면, 용서할 힘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원수조차 불쌍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결론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님이 주셔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김같이 나도 그를 불쌍히 여김으로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고, 영광의 지위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귀한 마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가꾸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주여,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주님이 그동안의 나를 불쌍히 여기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주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인애하신 구세주여(찬송가 279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