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람은 어느 정도 슬픔에 익숙합니다. 불안과 걱정에도 어느 정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경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언제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큰 기쁨을 경험해보셨습니까?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입니까? 병이 다 나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입니까? 돌아올 줄 몰랐던 자녀가 돌아온 순간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들’을 알아보며, 그 기쁨이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며,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알아보면서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이 올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시편 126-1-3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BC 586년 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제 낯선 땅에서의 고난과 고통의 포로 생활을 모두 끝내고, 너무나도 그리던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현실 같지가 않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잠도 오지 않습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연신 입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한국은 분단국가입니다. 남한은 자유 대한민국이요, 6.25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번영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공산주의 독재국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사는 그들에게 닥친 것은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없다 보니 자유와 인권이 유린당하고 마치 지옥처럼 되었습니다. 그런 지옥과 같은 곳에서 생명을 걸고 탈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명 ‘탈북민들’입니다.
그들이 탈북하다가 잡히면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 노동소로 끌려가든지,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그런 탈북민들 중에 한국에서 유튜브 방송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얼마 전 그들이 같은 탈북민을 초청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들이 극적으로 탈북하는 그 순간을 기억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너무나 큰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생사를 오고 가는 순간이었어요. 그러나 마침내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버스로 인천대교를 지나면서 ‘휴-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안도의 긴 한숨이 나왔어요. 그리고 긴장이 풀어지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살았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어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런 큰 기쁨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예수님 믿게 하시므로 그 끔찍한 지옥에서 건져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런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크고 작은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외국 땅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났습니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런저런 할 일도 많고, 지금 당장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왜 또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겁니까?
아- 마음에 슬슬 짜증이 납니다.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눈을 떠보니 그 큰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 그동안 이것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날아갈 것 같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었습니다.
입에서는 할렐루야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도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나는 기쁘도다.” 할렐루야! 아무쪼록 2026년도 새해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구원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잃어버린 자가 돌아올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한 어머니에게 귀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일찍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는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웠습니다. 가난하지만 어린 아들을 데리고 교회에도 다녔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나름대로 감사와 행복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 어머니에게 반항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늘 눈물로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성탄절 날, 그 방탕했던 아들이 10년 만에 교회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반응은 “잘 왔다.”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네가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늘의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99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눅15:7) 그렇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우리는 ‘총동원 전도 축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온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 얼마나 기쁜지! 그들과 허그를 하며 “잘 왔다. 잘 오셨습니다.” 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은 기쁨이 있지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이런 큰 기쁨에 대해 예수님이 친히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자에게 양 1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양떼들을 데리고 초원으로 가서 풀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쉴만한 물가에서 물도 마시우고, 푹 쉬다가 우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양떼들을 세어보니 어라- 99마리입니다. 다시 세어보아도 99마리입니다.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순간 목자는 아찔합니다. 양은 공격 무기가 없습니다. 방어 무기도 없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목자는 즉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온 들판과 골짜기와 산을 찾도록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았습니다.
“애야- 이 녀석아, 너 왜 왜 여기 있니!” 목자는 너무나 기뻐서 그 어린 양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룰루랄라-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친구여,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노라.”
이어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여자에게 10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한 드라크마의 가치는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10드라크마는 100만 원(1,000불) 정도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 큰돈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드라크마는 그냥 화폐 100만 원이 아닙니다.
결혼을 앞두고 신랑이 신부에게 결혼 언약의 증표로 건네는 한 세트입니다. 신부는 이 10드라크마를 줄로 꿰어서 머리 장식으로 사용합니다. 10개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세트의 가치가 떨어지고 맙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곧 결혼할 신랑과 신부의 마음이 계속 찝찝합니다.
그런데 그 10개 중에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디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아- 이거 없으면 안 됩니다. 그녀는 그 하나를 찾기 위해 등불을 밝히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아이고- 너 여기 있었구나! 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너무나 기쁩니다. 그녀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말합니다. “친구여,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이 이야기 후에 예수님이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던 둘째 아들이 거지꼴을 하고 몇 년 만에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아들을 따뜻이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여봐라. 돌아온 내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도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자기 동생이 돌아온 것을 전혀 반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화를 내고 불평하며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저 새끼가 돌아오매(아- ‘저 새끼’가 아니고 ‘저 아들’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흥분을 해서... 아무리 흥분을 해도 욕하면 안 되지요. 자- 다시 수정합니다.) 저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송아지를 잡으시고 잔치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 왜 하나밖에 없는 자기 동생이 돌아왔는데, 형은 반갑고 기쁘게 그를 맞이하지 못하고, 화가 나고 불평을 하는 겁니까? 왜지요? 아마 십중팔구 돈 때문일 겁니다. 일단 동생은 자기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 중에 자기 몫을 이미 받았고, 그것을 모두 날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를 반기고 다시 아들로 맞이했으니, 형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유산 중에 자기의 몫이 또 빠져나갈까 봐 기분이 매우 나쁜 겁니다. 그리고 형이 기분이 나쁜 것은 동생이 집을 나가자, 그동안 아버지가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하고만 이야기를 했는데, 동생이 다시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자기보다 동생을 더 챙기는 겁니다.
형의 입장에서는 그게 꼴 보기 싫은 겁니다. 동생을 향하여 이런 노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무슨 노래지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그리고 저- 미운 새끼 한 대 쥐어박고 싶습니다.(아- 또 ‘저 새끼’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자꾸 제가 흥분을 잘합니다) 하여간 형은 동생을 집에서 당장 쫓아내고 싶습니다.
아니- 여러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고 너무나 기쁜데, 왜 첫째 아들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마음이 계속 안 좋습니까? 다름 아닌 그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가 잔뜩 나서 불평을 쏟아내는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 하나님 아버지는 매우 매우 기뻐합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큰 기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 정말 많습니다. 그중 하나님이 오래전에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 너무나도 기쁩니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해 늘 불행하게 살던 ‘사라’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드디어 25년 만에 성취되었습니다. 90세의 여인이 기적적으로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없어서 웃음을 잃고, 우울과 슬픔 속에서 사는 여인에게 웃음을 안겨주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정에도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도저히 성취되기 힘든 그 약속이 성취되니 사라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실망과 절망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약속을 주시는 분이요,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 약속을 성취시키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온 인류가 저주와 질병과 사망의 절망 속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우리에게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 즉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그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된 겁니다. 고로 우리는 기쁩니다. 매우 매우 행복합니다. 여러분, 성경엔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어보십시오. 성경을 읽는 중에 그 약속이 개인에게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혹은 기도 중에 하나님이 개인에게 약속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까요? 때가 되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좀 더 인내해 보십시오. 그리고 드디어 그 약속이 성취되는 날, 우리는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기뻐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잠도 잘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분문 말씀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리로다.”(습3:·17) 여러분,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처럼 슬픔보다 기쁨을 원하시며, 불행보다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은 자신과 같은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입니다. 좀 더 리얼하게 예를 들면 강아지를 키워보신 분들은 잘 알 겁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반갑게 맞아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와이프도 아니고, 다 큰 자녀들도 아니고, 바로 강아지입니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옵니다. 막- 안기려고 합니다. 그 강아지를 바라보면 힐링이 됩니다. 그리고 강아지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아- 이 애가 나를 진짜 많이 좋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강아지는 진짜 나를 좋아합니다.
하루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그럽니다. 물론 강아지도 주인에게 삐질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그건 대부분 주인이 잘못해서 그런 겁니다. 그때는 주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합니다. 말로만 아니고 간식도 좀 주면서 비위를 맞춰줘야 합니다. 그러면 금방 강아지의 마음이 풀립니다. 다시 좋다고 다가와 주인에게 안깁니다.
강아지는 사람처럼 섭섭함이나 갈등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하고 혹은 자녀하고 원수가 될 때가 있지만, 강아지하고는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강아지는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나를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때로는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뒤로 발랑 자빠지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와 윤리와 도덕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나를 향한 애정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나의 열렬한 팬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합니다. 그분은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놓으신 분입니다.
나 같은 못난이를 위해 그 귀한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 미쳤습니까? 아- 하나님!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요. 하나님,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하나님, 지금 대단히 실수하신 겁니다. 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할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 절대 손해 보지 마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시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기쁜 관계입니다. 그 기쁨이 너무나도 커서 까무러쳐질 지경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기에 졸도하고 실신할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이 큰 기쁨을 얻으십시오. 혹시 이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그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너무나 기뻐서,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십시오.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아하- 이래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구나.” 하고 이 말씀이 절실히 깨달아질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실 겁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제발 행복하게 사십시오. 기뻐하며 사십시오. 그리고 그 기쁨이 주님의 나라 천국에서도 계속 이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