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어느 봄날, 한 거리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 거지가 무릎 위에 표지판을 올려두고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앞을 못 봅니다. 도와주세요.” 그 표지판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른 척 지나쳤고, 그의 바구니에는 동전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한 시인이 지나가다가 정지했습니다. 시인은 표지판을 집어 들고, 뒷면에 무언가 새로운 문장을 적은 뒤 다시 남자의 무릎에 올려놓고 떠났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더니 그 바구니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돈이 쌓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구걸하던 거지가 그 시인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표지판에 뭐라고 적으셨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뀌었나요? 보십시오. 많은 돈이 쌓였습니다.” 시인이 적어둔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따스한 봄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봄을 볼 수가 없군요.”
여러분, 원래 쓴 글과 나중에 시인이 쓴 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원래의 표지판인 “저는 앞을 못 봅니다. 도와주세요.”라는 글은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사실과 정보를 전달할 뿐이었습니다. 그 글을 본 행인들은 “그렇지 뭐! 사실이네.“ 하고 전혀 감동하지 않고 바쁜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바꾼 문장인 “따스한 봄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봄을 볼 수가 없군요.”라는 글은 사람들에게 뭔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글을 바라보는 순간 행인들은 “그래, 내가 지금 눈을 뜨고 봄날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적 같은 일인가!”라는 상황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즉 매일 보던 봄 풍경이라는 당연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솟아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자 그들은 이 아름다운 봄날을 보지 못하는 장님을 향해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저 장님보다는 낫구나!” 하는 마음의 여유와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적선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링컨 대통령의 참모들과 군사들은 매일 이어지는 패배와 막대한 희생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무겁고 불평과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더구나 한 장군이 찾아와 참담한 표정으로 보고했습니다. “대통령님, 이번 전투에서도 많은 군사를 잃었고 물자도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조용히 종이를 꺼내 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 우리가 잃은 것들에 대한 목록은 이미 충분히 들었소. 이제 우리가 아직 잃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봅시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싸울 의지가 있는 남아있는 용감한 군사들이 있고, 우리를 지원하는 신실한 국민들이 있으며, 정의가 우리 편이라는 확신이 있소.”
링컨은 가장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불평의 늪에 빠지지 않고, 아직 남아있는 감사할 것들에 시선의 안테나를 켜두었습니다. 결국 그 감사의 시선은 군대의 사기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감사로 깨어있다는 것은 삶이 완벽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웃고 행복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비록 상황이 캄캄하고 어두운 밤이어도 하늘에 있는 별 하나를 발견해 내는 마음의 눈을 계속 뜨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낙심은 물러가고, 희망이 솟아납니다.
이번엔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매사에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은 날씨가 아주 좋았고, 농부의 벌들은 전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꿀을 모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를 찾아가 축하를 건넸습니다. “여보게, 이번 해에는 벌들이 꿀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모았네! 이 정도면 대풍년 아닌가? 정말 감사할 일이야.”
그러자 농부는 이마를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풍년은 무슨... 벌들이 꿀을 이렇게 많이 모아놓았으니, 이제 저 많은 꿀을 일일이 짜내고 병에 담느라 내 팔과 허리가 아파서 뒤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나네. 아- 이 벌꿀 녀석들 좀 적당히 꿀을 모으지.”
여러분, 이 농부 새끼 좀 보십시오. 아- ‘새끼’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새끼’가 아니고 농부 ‘어르신‘이지요. 아- 남들은 흉년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데, 자신은 큰 풍년이 들었으면 이거 매우 매우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99개의 감사보다 1개의 불평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자신을 스스로 괴롭힙니다. 참- 불행하게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여러분, 인생 행복하게 사는 사람과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그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입술에 늘 “아- 짜증 나!”라고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지고요, 반대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같이 한번 따라 해봅시다. “아- 짜증 나!”라고 하면 안 되고요. 뭐라고 하지요. 같이 따라 해봅시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인상 팍- 쓰면서 마지못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기왕이면 인상 펴고 기쁜 마음으로 해봅시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래도 인상 쓰시는 분이 딱- 한 분이 있는데, 오늘 아침이나 어제 뭐 잘못 드신 것 없으시지요? 뭐- 그럴 수 있습니다. 인생 살다 보면 참으로 힘든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조그만 문제라도 계속 생기면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4:2)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기도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즉 문제가 생겨 짜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짜증과 불평의 상황 속에서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오늘 이 일, 저 일로 인해 매우 기분이 안 좋습니다. 성경엔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했는데 저는 지금 감사는커녕 자꾸 불평이 솟아납니다. 그러니 이 불평을 제거해주시고 감사의 마음을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감사의 제목을 하나 둘 셋... 계속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내 입에서 자동적으로 감사의 고백이 튀어나올 수 있도록 내 입술을 감사로 무장시키는 훈련을 스스로 하십시오.
누가 옆에서 툭- 치면 “아- 짜증 나! 뭐야 새끼야!” 하고 눈 부라리지 마시고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어쩐 일이시지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그 짜증을 도리어 감사로 바꾸어 표현하십시오. 물론 이게 말은 쉬운데 그냥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렸을 적의 가정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고,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태도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불평과 짜증을 감사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언제 어느 순간에도 감사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나에게 주신 그 은혜와 축복, 그리고 장래에 이루시는 그 엄청난 희망의 풍성함을 생각하면 이런 감사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오- 주여, 제가 무엇이관데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십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불평과 짜증과 원망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지치게 합니다. 고로 그런 짜증 섞인 말과 표정과 행동으로 남을 계속 지치게 하면, 그 사람은 결국 스스로 고립이 되고 맙니다. 남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왕따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른 외국 땅에서 소수 민족으로 이민 생활하는 우리들의 경우는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히 높습니다. 여기서는 떨어지면 낙동강입니다. 이곳 외국은 쉽게 코너로 몰릴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고로 그런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풀지 못하고 계속 쌓아두면, 나도 모르게 짜증과 불평의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마음의 찌꺼기를 계속 쌓아두면 자칫 우울증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우울증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그거 현대인들은 누구나 걸리는 가벼운 병이 아닌가?”라고 쉽게 생각하시는데, 아닙니다. 우울증은 일종의 뇌의 회로가 내 마음대로 작동이 안 되는 병입니다.
컴퓨터로 비교하면 가장 중요한 실행프로그램에 버그가 발생하여 정상 작동이 안 되는 병입니다. 그 결과 감정과 기분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일상생활도 힘들어지고 맙니다. 당연히 사회생활도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우울증이 진짜 힘든 것은 이 병이 상당히 오래가고 난치병이라는 겁니다.
고로 외국 땅에서 이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늘 스스로 마음의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기분이 좋아져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저 어떤 이론과 사상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같이 감사하며, 나와 같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본 교회 목사님으로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주님 안에서 늘 감사의 고백이 나와서 이 외국 땅에서도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기왕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의 평생에 감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예화 하나를 더 소개하므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프랑스 화가 밀레(Millet)의 대표작 ‘만종’에 얽힌 실화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시골 마을, 해 질 녘 노을이 깔린 들판에서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고 있습니다. 멀리 교회 종탑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만종)에 맞춰 하루의 노고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한번 보여 주실래요)
이 그림에는 마음을 울리는 비하인드 스토리와 묵직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밀레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빵 한 조각을 사서 먹을 돈이 없었고, 땔감이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겨우 연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레는 절망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밀레야, 들판에서 일하다가 저녁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신 하루와 양식에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한단다.”
그날도 밀레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밭에 굴러다니는 감자 몇 알, 그리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밭일지라도, 오늘 하루 이곳에서 일하게 하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이 그림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어쩌면 감사의 조건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환경 속에서 드린 깊은 감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그림의 바닥에 놓인 작은 바구니에는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신이 담겨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즉 화가인 밀레는 너무나 가난해서 아이를 잃은 농부의 슬픔을 표현하려 했었지만, 친구의 권유로 아기 대신 감자를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훗날 루브르 박물관에서 자외선 감정을 통해 실제로 그 바구니 자리에 아기 모양의 초벌 그림 흔적이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것과 같은 극한의 비통함과 삶의 절망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의 기도로 승화시킨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감사는 환경이 좋아서 나오는 조건반사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해 내는 영적인 선택입니다.”
여러분, 건강하고 부유해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때로는 삶의 아픔이 밀려올 때조차, 나를 살아가게 하시는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며 감사를 드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감사함으로 깨어있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늘 감사로 깨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발견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다가 영영 지옥에 빠지고 마는 죄인을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감사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 은혜를 계속 감사로 표현하며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