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러분, 혹시 아침에 알람 소리 들릴 때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시나요? “5분만 더…. 아니 10분만…. 에이, 오늘 그냥 학교 가지 말까? 연차를 쓸까?” 솔직히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이런 말을 외치잖아요. “아, 진짜 하기 싫다!”
피곤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또 직장에 가려고 할 때, 혹은 다가오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야 할 때, 심지어 주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아- 교회 가야 하는데, 피곤한데, 오늘은 교회 가지 말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뭔지 아세요? 그렇게 가기 싫은 거 참고 간 학교에서 빛나는 졸업장을 받고 스펙을 쌓습니다. 진짜 출근하기 싫었던 그 직장에서 월급이 들어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진짜 하기 싫다’라고 외쳤던 그 수고들이, 역설적으로 지금의 내 삶을 지켜주는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베드로한테 되게 솔직하고 뼈 때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 젊을 때는 네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다녔지? 근데 나중에 늙어서는 남이 너한테 띠 띠우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거야.”(요21:18)
즉 예수님은 아셨던 겁니다. 진짜 어른이 되고, 진짜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는 건 내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는 단계에서, 내가 원치 않지만, 가치 있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기꺼이 해내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걸요.
성경에 보면 진짜 억울함의 끝판왕이 한 명 나옵니다.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냥 예루살렘에 구경하러 왔다가, 로마 군인한테 얼떨결에 붙잡혀서 “야, 너 일로 와. 너가 대신 십자가를 들어!” 하고 예수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됩니다.
아- 얼마나 황당하고 기분 나빴겠어요? “아니, 내가 왜? 나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그런데 그렇게 투덜거리며 억지로 남의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그 길에서,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숨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듣고, 그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보게 됩니다. 그 ‘억지 순종’의 자리가 계기가 되어, 훗날 이 사람의 집안 전체가 초대교회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는 믿음의 가문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등 떠밀려서 하게 된 봉사, 억지로 참여한 수련회나 모임. 그런데 내가 원치 않아서 억지로 끌려간 그 자리에서, 뜻밖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반전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의 경우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 와서 교회를 개척한 지 이제 29년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제가 잘한 것이 몇 개 있습니다. 첫째,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성전을 마련한 것이고요. 둘째, 여기서 종말론 휴거에 관한 ‘디데이’ 책을 쓴 것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게 뭘까요? 29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어떤 때는 겨울에 밤새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도로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도로는 얼어붙어 미끄럽고 날씨는 상당히 춥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누구도 새벽예배에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라도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이제까지 왔다는 겁니다. 물론 때로는 새벽예배가 너무 힘들어서 “아- 도대체 이 새벽예배는 누가 만든 거야?” 하고 탄식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새벽예배입니다.
어찌 보면 이민 목회는 한국에서의 목회보다 육체적으로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벽예배만큼은 진짜 힘듭니다. 물론 저는 지금까지 29년 동안이나 새벽예배를 하다 보니 새벽예배가 없는 날에도 그 시간에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새벽에 잠이 많은 젊은 분들은 새벽예배가 굉장히 힘들 겁니다.
그래서 저와 같이 29년 동안 새벽예배를 드리는 있는 저의 집사람과 함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민 목회에서 새벽예배가 없으면 진짜 편할 텐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이 저희에게 새벽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성전을 주셨고, 새벽예배에 나와서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새벽 기도 덕분에 그래도 외국 땅에서 버틸 수 있었고, 지금까지 왔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그 일이 나에게 가장 유익이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교회에서 가장 하기 싫고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헌금입니까? 그중에 십일조는 진짜 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헌금과 십일조를 하시는 분들은 왜 하시는 겁니까? 바보예요? 미쳤어요? 물론 성경에 나와 있듯이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씀도 있고, 나름대로 체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인플레이션이 심하고 월급은 안 오르는 상황에서 십일조는 너무나 액수가 크고 힘들다고 많이들 느끼실 겁니다.
“이 돈이면 내가 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돈으로 카드 돌려막기를 해야 하는데... 이 돈이면 여행도 다닐 수 있는데... 이 돈으로 모기지(렌트비)를 내야 하는데...” 등등 참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탐심을 꺾고, “내 삶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라고 내 통장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며 나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 상당수가 십일조의 축복을 체험으로 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의 집 이야기입니다. 저의 가정에 삼 남매가 있었습니다. 저는 뭐 주의 종이고 은혜를 받아서 당연히 십일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LA에 사는 제 여동생은 그리 큰 은혜를 받지 않은 것 같은데 초등학교 때부터 주일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어렸을 적부터 십일조와 헌금을 잘 드립니다.
그런데 제 누님은 아버님이 용돈도 주고, 따로 헌금하라고 돈도 주는데 그 헌금마저도 드리지 않습니다. 즉 돈에 아주 민감하고 인색합니다. 그런데 제가 누님 돌아가시기 10년 전쯤에 한국에 간 적이 있어서 누님을 만났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십일조는 떼어먹으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십일조를 드려. 그거 안 드리면 작살나.”
“응- 이게 웬일이지? 그동안 무슨 체험이 있었구나!” 여러분, 십일조는 드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십일조는 그만한 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습니다. 어떤 값을 할까요? 너무나도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3:10-12)
여러분, 요즘의 세대는 ‘나의 행복’과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한 세대입니다. 조금만 내 감정에 안 맞거나 손해 보는 것 같으면 “손절!”을 외치기 쉽습니다. 더구나 나를 계속 피곤하게 하고,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손절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의지적으로 품어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그건 나를 더욱 지치고 피곤하게 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나의 본능이 그것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치 않는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그 일을 하기를 잠잠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이혼합니다. 결혼식장에서는 “괴로우나 슬프나 평생 사랑하겠다.”라고 분명하게 맹세해 놓고 나중에 갈라서는 이유가 뭘까요? 다름 아닌 사랑을 ‘내 감정’과 ‘나의 유익’을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이 식고 상대가 나를 서운하게 하면 참을 이유가 사라지는 겁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사랑은 다릅니다. 세상은 내 감정이나 조건 따라 움직이지만, 성도는 “주님이 원하시니까, 주님이 나 같은 사람도 참아주고 품어주셨으니까” 하며 내 기준을 내려놓고 주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한 번 더 품어줍니다. 아멘인가요? 아직도 노멘인가요?
그렇게 내 감정을 넘어서 주님 때문에 버티는 그 자리에, 진짜 단단하고 깊은 관계의 기적이 생겨납니다. 즉 내가 원치 않는 그 자리가 나를 가장 성숙하게 하고, 나를 가장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만들어줍니다. 다시 말해 진짜 축복은 내가 원치 않는 그 자리에서 결정이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그 끔찍한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하나님, 진짜 가능만 하다면... 이 잔을 그냥 지나가게 해주시면 안 돼요?”(마26:39) 여러분, 예수님도 그 자리는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픈 거는 싫어요, 죽음은 싫어요. 피하고 싶어요” 하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주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하고 싶은 내 감정을 주님께 정직하게 고백은 하십시오. 그러나 결국에는 주님의 뜻에 내 삶을 맡겨드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 가장 쿨하고 멋진 순종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그곳에서 원치 않는 고난을 주실 때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의 그 일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원하는 편한 길, 내 마음대로 되는 상황에만 있을 때는 주님이 잘 안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 진짜 이 자리는 피하고 싶다. 이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하는 그 자리에서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맡길 때, 우리는 나를 위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가장 깊고 친밀하게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탁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학교, 직 장, 교회,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피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곳은 주님이 여러분을 버리신 자리가 아니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은혜의 현장입니다. 아무쪼록 주님과 함께 내가 원치 않는 그 길도 담대하게 걸어가는 멋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주님, 솔직히 매일의 일상이 피곤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순종보다 내가 원하는 편한 길을 가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 기분과 감정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내가 원치 않는 순간에도 주님 뜻에 순종하며 한 걸음 더 성숙의 길로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그곳에서 주님과 더불어 얻는 진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