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얼마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 축구 경기를 스마트폰으로 보던 중이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이 도란도란 서서 국가를 제창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잉글랜드 국가인 ‘God Save the King(하나님, 왕을 구원하소서)’이 경기장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데, 순간 “어- 이거 뭐지?” 하며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율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와 멜로디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찬송가 선율을 들으며 이 노래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역사 속에서 이 멜로디는 참으로 사연이 많았습니다. 영국인들이 자기네 왕을 위해 불렀고,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가사만 바꿔 이 곡을 국가로 썼습니다.
심지어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스위스 옆에 있는 아주 작은 유럽 나라도 이 노래를 자신들의 국가로 부릅니다. 그래서 잉글랜드와 리히텐슈타인 간에 축구 경기를 하면 똑같은 국가가 두 번 연주가 되는 진기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전 세계의 대제국들이 왕의 권력을 찬양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이 장엄한 멜로디를 연주할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 선율에 시편 46편의 신앙을 얹어 찬송가로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한 자, 문제가 있는 자, 각종 스트레스를 받는 자, 다른 데 가지 말고 이리 오라.”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 환난, 그 문제로 인하여 너무나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곳 외국 땅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각종 환난을 당하고 살아갑니다. 낯선 외국 땅이기에 그 환난은 우리에게 더욱 큰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부른 이 찬송의 고백처럼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나아왔으니, 하나님을 만나며, 그 안에서 하나님만이 주시는 큰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시다시피 낯선 이 외국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앞에서 매일 나를 증명해야 하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다가, 주일에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떻습니까? 익숙한 모국어가 들리고,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며, 나를 알아주는 동포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참 따뜻한 이민자의 삶의 안식처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많은 이민자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교회에 왔다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과 커뮤니티를 피난처로 착각하곤 합니다.
나와 똑같이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을 완벽한 피난처로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교우에게 상처를 입어 신앙의 본질까지 흔들린 채 방황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6편의 배경을 보십시오. 이 시는 고라 자손들이 쓴 시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의 배경을 히스기야 왕 시절,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유다의 성읍들이 앗수르의 군대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로 추정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 군대, 동맹국이라는 인간적인 피난처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완벽한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 위기 속에서 사람들을 원망하며 주저앉지 않았고, 눈을 들어 진짜 피난처인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요새가 무너진 비통함 속에서 고백한 노래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어찌 보면 교회 안의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처를 안고 숨어든 ‘영적 이재민’일 뿐입니다. 사람이라는 임시 대피소는 언젠가 무너지고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실망해 내 마음이 무너진 그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진짜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할 영적 신호탄임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는 ‘사라’라고 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사라에게는 자신의 몸종이요 노예인 애급 여인 ‘하갈’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사라의 인생도 참으로 기구하지만 ‘하갈’의 인생도 참으로 기구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자녀를 10년이 지나도록 갖지 못하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잠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여종 하갈을 씨받이로 삼아 자녀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갈이 임신을 하자 어라- 하갈이 주인마님 사라를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여주인 사라가 “아- 이년 봐라.” 하고 화가 나서 하갈을 학대했습니다.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하갈이 임신한 몸으로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어찌 보면 하갈의 마음는 “내가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졌는데 왜 나를 이따위로 대접하고 못살게 구냐? 나도 이제 어엿이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진 귀하신 몸이라고.” 하는 데모성 가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출하여 황량한 광야로 나와보니 광야에서 당장 살길이 막막합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이때 하나님은 광야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주시고 그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아, 네 여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복종하라.”
아니, 하나님은 왜 하갈을 다시 상처의 자리, 박해를 당하는 자리, 힘든 역경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피난처는 현실을 피해 도망치는 도피(Escape)가 아니라, 현실을 이겨낼 힘을 얻는 회복(Restoration)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갈은 이전의 하갈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은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이 계셨기에,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히 어려운 삶의 자리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도피하는 하갈에게 세상을 이길 회복과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흘러 자신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17살이 될 때였습니다. 그동안 여주인 사라도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아 세 살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갈에게 두 번째 광야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주인마님이 낳은 아들 이삭을 못살게 구니까, 결국 아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에서 완전히 추방을 당해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챙겨준 것은 단지 물 한 가죽 부대였습니다. 그녀는 그 광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물이 떨어져 당장 죽게 생겼습니다. 더구나 아들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하갈은 방성대곡을 합니다. 어찌 보면 저와 여러분의 이민의 삶도 광야로 쫓겨난 하갈처럼 내 힘으로 쥐고 있던 마지막 물 가죽 부대가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살길이 막막하고 “아- 이제는 여기서 죽을 수가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다시 하갈을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혀 주시니, 이미 그녀의 곁에 예비되어 있던 샘물이 보였습니다. 인간 아브라함이 챙겨준 물은 다 떨어졌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샘물이 이미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갈과 이스마엘(셈족과 함족의 융합)의 후손들은 훗날 아라비아 광야에서 거대한 아랍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노예이지만 인간적인 학대와 이민의 서러움으로 찢겨 나간 한 여인의 통곡을 들으시고 그녀의 피난처가 되어주셨고, 그녀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섭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억울하게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해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각각 3개씩, 총 6개의 ‘도피성’을 만드셨습니다. 이 도피성은 단순히 죄인을 꼭꼭 숨겨주는 은폐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과 재판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이 언제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자유인으로 일상생활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당대 대제사장의 죽음이 있을 때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어야 비로소 도피성의 성문을 열고 당당한 자유인으로 세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복음의 모형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도피성에 갇혀 있던 우리의 모든 죄와 세상의 두려움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에 떨어 숨어 지내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고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 즉 진리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저주에서 질병에서 각종 환난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자유케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캘거리 순복음 중앙 교회’입니다. 29년 전 우리 교회가 처음 생겨날 때 이런 표어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꾸만 이 표어를 ‘사람과의 만남이 있는 곳’으로 변질시키려 합니다. 사람과의 만남만 가득한 교회는 결국 상처와 실망의 장소가 되고 맙니다.
이곳 캘거리 순복음 중앙 교회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도피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세상에서 도망쳐 나와 우리끼리만 꼭꼭 숨어 지내는 폐쇄적인 요새가 아닙니다. 이민자의 삶의 억울함과 지친 마음을 안고 도피성 같은 교회로 나아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치료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치료를 받았다면, 이제 다시 도피성 문을 열고 당당하게 자유인의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월요일의 세상 속으로 걸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그 사람들에게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먼저 피난처인 하나님을 만나고 용기를 얻은 후 그들에게 나아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곳이 바로 ‘캘거리 순복음 중앙 교회’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힘들어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특히 이 외국 땅에서 사는 우리에겐 내 아픔을 살피시고, 내 통곡을 들으시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서 살길을 찾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물 가죽 부대는 반드시 바닥을 드러냅니다.
사람이라는 임시 대피소는 언젠가 무너지고 상처를 줍니다. 이제 시선을 사람에게서 돌려,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십시오. 첫 번째 광야에서 하갈을 돌려보내시며 버틸 힘을 주셨던 그 하나님이, 두 번째 광야에서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이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하늘의 평안과 생수를 채워서, 내일부터 또 시작되는 세상의 삶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승리하시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거친 이민의 삶 속에서 때로는 외로움 때문에, 때로는 낙심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가 실망하고 상처받았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진짜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